사천왕을 기억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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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우고 싶어도 지워지지 않는 언짢은 기억이 있고 너무 소중해서 항상 마음에 새기려 해도 시간이 지나면서 잊혀지는 기억도 있다. 문제는 내 건망증인데  증세가 꽤 심각해서 그 같은 구분 없이 무조건이다. 아까 안국동 현정이사무실로 가려고 인사동 옆길을 지나다가 조계사 입구를 보고 문득 작년 이맘때의 기억이 갑자기 떠오름과 동시에 정수리 부근에서 뭔가 따끔한 게 느껴졌다. 그냥저냥 살아가더라도 절대로 잊지 말아야 할 것. 그것은 누군가 내 뒤에서 다짜고짜 따져 묻는 기습적인 질문이며 그것에 놀라 정신이 번쩍해지는 경우이리라. 사실 그리 오래된 일도 아닌 탓에 좀 민망해지지만 나한테 작년 겨울은 너무 추워서 평생 잊혀지지 않을 것 같던 기억이고 그때 했던 사천왕상 작업은 내가 망치를 들고 작업을 하는 한 평생 되새겨야 될 소중한 경험이었다.



작년 겨울, 평소 철 좀 다룬다고 까불던 난 사천왕에게 아주 처참하게 밟혀있었다. 사실  종교미술을 하게 된 기회 자체가 부담스런 일이었고 그것이 문제라면 문제였지만 그 작업이 시작되기 전, 나는 매우 자신만만해 있었다. 익숙하게 다뤄온 재료와 기법, 결과물에 대한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내 얇은 자존심과 자신감은 딱 그 정도 수준까지였다. 레이저로 잘려진 수천 개의 철 조각들이 막상 내 작업대 위에 대책 없이 펼쳐졌을 때 설마, 어쩌면 이것을 정해진 시간 내에 다 해낼 수 없을지도 모를 것이란 물리적 부담감이 순식간에 알량한 내 자신감을 무너뜨렸으며 내가 과연 종교미술을 할 수 있는 자격이 있기나 한건가 라는 자괴감으로까지 번졌고 급기야는 편지라도 써놓고 어디론가 도망치고 싶었지만 그럴 수도 없었다. 그동안 날 지탱해 준건 그래도 철 작업에 대해 내가 키워온 자존심 같은 거였는데 이번엔 분명히 거기에 대한 책임을 져야 될 차례였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그렇게 심상치 않은 부담감 속에서 작업은 시작됐고 그래도 초반까지는 심리적인 컨디션을 조절해가면서 한편으로 기록과 분석을 병행할 수 있었지만 작업이 막바지로 가면서는 결국 사진 한 장, 글 한 줄을 남길 수 없을 정도의 최악의 상황까지 이르고 말았는데 이유는 어이없게도 종교미술이니, 조형이니, 자존심이니, 심리적 압박 같은 따위의 정신적인 종류의 것이 아니라 부끄럽게도 단지 너무 춥고 몸이 힘들어서였다.  정신적인 고통은 육체적인 고통에 비하면 사치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그때서야  깨달았으니 내가 평소 입으로만 떠들던 노동에 관련된 수사들은 대체 얼마나 낮간지러운 겉멋이었는가!



어쨌든 그때, 그 절체절명의 위기상황에서 다 쓰러져가는 화성공장을 지켜준 건 전적으로 목리식구들과 효욱이, 기세, 용수, 종성이, 민수의 도움이었다. 생각 난 김에 그때의 작업일지와 사진들을 정리해 보기로 한다. 사실 당시에도 네이버 포토로그에 그날그날 작업과정을 기록했는데 대부분 작품화면이 변화되는 사진들로 그날 작업을 분석하고 다음날 계획을 짜는 자료로 활용됐고 이런 사진을 포함한 총 사진수가 육백장이 넘는다. 이렇게 그때 사진을 하나하나 넘겨보니 초반에는 그래도 요즘처럼 직접 사진도 찍고 여유를 부리다가 작업후반으로 갈수록 기세가 찍은 사진들이 많아지고 짤막한 작업일지에는 앓는 소리가 점점 많아진다. 나한테는 귀중한 자료로 남게 된 이 사진들은 하필 그때 오른손이 부러져서 날 직접 도와주지 못하고 대신 사진을 찍어준 기세덕분이다. 하지만 이 사진들이 담아내지 못한 빠진 부분도 상당부분 있는데 눈으로는 볼 수 없지만 코와 목으로 절절히 느낀 연기와 분진, 하루 종일 고막을 울리던 그라인더소리, 깔깔이를 찢고 들어오는 칼바람, 그리고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하게 뱉은 내 신음소리가 그거다. 어찌됐건 내 느낌에 사진보다 실제의 작업현장은 훨씬 더 춥고 살벌했지만 작업 후반부, 사진 여러 군데에 잡혀있는 내 액션들에 대해서는 미리 자백해야겠다. 사진으로만 보면 꽤나 진지하고 여유로워 보이지만 내 기억으로는 육체적 고난에 질려 허둥대는 꼴을 더 많이 보인 것  같은데....



어쨌든 오늘 이렇게 사진들을 뒤적거리다 보니 이제야 그해 겨울의 강렬했던 기억이 생생하게 느껴진다. 사진 올리는데 시간이 이리 가버렸구나  작업일지는 낼 끼워 넣어야겠다. ....밤이 늦었지만 참 보람된 하루였다. 2008/02/01 03:59

  • Posted under Buddhahood
  • Posted at 2008/09/23 0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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